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일화는 사람의 운명을 많이 생각하게 하는 일화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성서 속에 있는 예수와 제자들의 만찬을 그림으로 그려달라는 교황청의 부탁을 받는다.
당대 최고 화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예수와 닮은 인물을 찾아내 그림을 그린다. 그는 가롯 유다만 빼고 그림을 완성했다고 한다.
유다의 특성을 고려해 그림을 그려야 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깊은 고민에 빠졌고 결국 그는 로마의 감옥에 가서 사형수들 중 악인의 모습을 한 유다의 얼굴을 찾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를 감옥에 돌려보내려고 하자 그 죄수는 자기가 예수의 모델이었던 사람이라고 고백했던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너무 놀라서 붓을 놓았다는 일화이다. 예수를 배반한 인물인 유다는 결코 선인일수 없다는 것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는 한 사형수를 선택해 그를 유다의 모델로 삼기로 한다.
이 일화가 사실인가의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널리 회자되고 있다.
이 비슷한 이야기는 또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실화에 근접한 이야기라 한다면 이것은 실화이다. 본명이 마리 끌레망틴이라고 불린 수잔 발라동에 대한 이야기이다. 수잔 발라동은 로트렉과 에릭 사티의 애인으로도 유명하며 르누아르의 그림의 모델로도 잘 알려져 있다.
특히 르누아르 그림에서는 외면의 아름다움이 돋보이지만 로트렉의 그림에서는 내면의 고독함이 드러난다. 행복한자와 불행한 자가 화가에 따라 다르게 묘사된 것이다.
나중에 수잔 발라동은 화가의 모델로 만족하지 않고 드가의 도움으로 화가가 돼 '아담과 이브' 같은 걸작을 남긴다. 우리는 두 이야기에서 한 인간이 신과 악인, 순수와 타락한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이란 존재는 정의할 수 없으며 쉽게 선과 악을 구분하기도 어렵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그야말로 사람의 삶은 아이러니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내일을 모르는 것이 사람의 운명이라는 말이 있고 인명은 재천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운명을 알고싶어 하고 미래를 점치려 하는 성향이 강하다. 신심이 두터운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꿈이나 작은 기시감에서 운명을 예감하며 산다.
신문을 보면 대개 오늘의 운세 란은 빠지지 않는다. 띠별로 구분돼 있는 오늘의 운세에 의지하는 사람들도 많다.
"산이 높으면 골짜기도 깊다" "산중에 묻힌 보석같은 형상" "순풍에 항해하는 돛단배 형상" "운기가 불리하면 인내와 노력이 필요" "과거의 고마움과 미래의 희망이 필요""조급하지 말고 천천히 추진""새로운 문서를 얻으려면 서쪽으로 길하다"
이것을 읽으면 마치 운명을 제어하는 어떤 법칙이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건 느낌이지 실재가 아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교과서 같은 말이 많다. 아니면 모호하고도 추상적인 표현이 넘치고 있다. 그리 지표가 될 수 없는 말들 투성 이지만 여기서 희망을 느끼고 개연성을 깨닫기도 한다.
꿈은 실제와는 반대라는 말은 어찌 보면 꿈이 실제처럼 이뤄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를 위로하고자 생긴 말일 수 있다. 운명은 야속하고 아이러니하다. 운명의 법칙성을 운세에서 깨닫기에는 가혹하고 가혹한 것이 운명이다.
운명은 아이러니하다는 말 밖에 위로가 될 말은 없을 듯하다.
불안이나 공포가 실재보다 더 무섭고 사람을 그늘지게 한다. 삶을 옥죄이고 실제로 목을 조르는 느낌이다. 인간은 엄습한 불안을 잠재울만한 힘은 없다. 전쟁이니 뭐니 하며 세상이 어수선 하다. 전쟁은 오늘의 운세 밖에 있는 가혹함 들이다. ‘전쟁의 운명’을 어찌할 수는 없다.
지금의 양상으로 봐서는 실제보다 말의 공포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 듯 하다. 그 시기는 예상보다 꽤 오래갈 수 있다는 점이다.
운명이 아이러니하다는 말이 위로가 되는 시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