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태우면 세상이 다시 태어날까? 이 과격한 질문을 해보는 이유는 세상을 수백번 태워도 세상을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번제’에 대한 유혹이 위정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적이 많을 줄 안다. 번제란 태우는 행위이다.
로마의 폭군인 네로 황제가 시적 감흥을 위해 로마의 시내를 불태웠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실제로 네로 황제가 그런 폭거를 저질렀는지는 검증되지 않았다.
전복의 의지가 강한 통치자일수록 번제에 대한 욕망도 강할 것이다. 새로운 도화지에다 밑그림부터 다시 그리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이다.
혁명의 모든 명분은 새로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가들이 이 ‘사실’을 팩트처럼 인용하는 이유는 뭇 군주들의 가슴속에는 세상을 내 방식대로 통치하고 싶은 욕망이 강하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것을 세우고 낡은 것을 몰아내는 것이다. 기득권을 뒤집어 위와 아래를 바뀌고 옆과 그 옆을 바꾸고자 한다. 새롭게 권력을 잡는 사람은 옛 것을 명분으로 삼았다.
기존의 제도가 나쁘고 잘못됐고 정치가 잘못됐고 사람들이 잘못됐다는 핑계를 대고 거병을 하거나 혁명을 일으켰다.
그냥 내가 권력에 대한 개인적인 욕망이 발동했기 때문에 이를 제어하지 못해 도모했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어떤 독재자나 모반자나 혁명가나 할 것 없이 자신의 도모는 불가피했다고 말한다.
또 혁명이나 변혁 때문에 생긴 희생은 매우 불가피하다는 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레닌은 자신의 묘비명에 미안하다고 그러나 불가피했다는 말을 썼다고 한다. 러시아 혁명과정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사과의 변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바뀜이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별로 큰 소용이 없는 듯 했다. 민중이 주체가 되어서 일으킨 것이나 군인이 중심이 되어서 일으켰거나 혁명가가 중심이 되어서 일으켰거나 할 것 없이 일시적으로 바뀐 듯은 하지만 근본이 달라지진 않았다.
물론 몇몇 성공한 케이스도 있다. 혁명무용론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혁명이나 변혁운동이 많은 희생이나 동원이 수반되지만 그 만큼 수여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세상을 자신의 틀로 바꾸려 하는 사람들은 연탄공장에서 연탄 찍듯이 일정한 금형에 넣고 찍는 경향이 있다. 그런 의식으로는 세상을 정말 바꾸기가 어렵다.
만약 그나마도 없었다면 구시대가 유지돼 역사는 발전이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튀어나올수도 있다. 물론 그런 말을 들어도 무리는 아니다.
자신을 경계하고 또 경계해도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그 나물에 그 밥처럼 순치되어 가는 존재이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은 모든 혁명가들과 변혁가 들의 가슴을 식게하는 말이며 김을 새게 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말은 위풍당당한 혁명을 부정하는 말이라고 할 수있다.
하지만 우리 현대사에서는 이런 명분 때문에 생각나는 악몽들이 한두개 아니기 때문에 지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해방이후부터 여태까지 우리가 참으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은 세상을 바꾸겠다는 말이다.
주체만 바뀌었을 뿐 레퍼토리는 거의 같고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레토릭이 강할수록 실천력이 약했으며 민의에 대한 배반은 너무 쉽게 이뤄졌다.
정의로운 사회나 약자가 존중받는 사회나 여러 가지 캠페인적인 슬로건은 많았지만 실천된 것은 그야말로 손으로 꼽기도 민망할 정도이다.
낡았다는 말은 뒤에 오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좋은 말로된 슬로건이 망가지면 사전적인 정의가 무너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일반적 윤리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마련이다. 정의를 외치지만 정의롭지 않다면 사회는 기준을 잃게 된다.
“헛똑똑이들이 깜박 잊고 물에 던져 넣지 않은게 있어 그게 없으면 저 화염은 아무것도 아니야. 온 지구를 통째로 숯으로 넣어버린대도 말이야"
“그게뭔데”
“바로 인간의 심장이지 저들이 음험한 동굴을 정화할 방법을 못 찾는다면 이렇게 엄청난 수고를 다해 태운 모든 잘못과 불행이 그 동굴에서 다시 나올거야 .예전과 똑같거나 더 나쁜 형태로. 장담하는데 다시 옛날같은 세상이 될거야”
이것은 ‘주홍글씨’를 쓴 나새니얼 호손이 세상을 태워 새 세상을 만들려는 사람들의 행위를 풍자한 단편 소설의 한 대목이다.
세상을 바꾼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